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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집착을 놓으라. 좀 흘리고 다녀라.”(2016.3.29.화.전병욱컬럼)
작성자 bsbcyp
작성일자 2016-03-30
조회수 200
추천수 43


1. “우상 = 내가 콘트롤하겠다.”


  우상 숭배는 누가 콘트롤하냐의 문제다. “나” 또는 “하나님”이다. 2계명이 강조하는 것이 “자기를 위하여”이다. 내가 콘트롤 하려는 시도가 우상이다. 자기가 콘트롤하기 위해서는 “축소”시켜야 한다.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앙이 뭐냐? 주일 성수, 십일조, 술, 담배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축소해 버린다. 물론 이해된다. 그러나 가짜다. 뼈만 남은거다. 실체가 아니다.
 
  하나님은 다 이해 못한다. 큰 하나님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이해되기도 한다. 우선은 찬양이다. “순종”이냐, “콘트롤”이냐?  이 싸움이다. 큰 하나님을 보고 사람들은 이해한 것이 아니라 놀랐다.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했다. 무서워 아무에게 아무 말도 못했다.”(막16:8) 경외다. 두려움이다.  종종 하나님을 불로 설명한다. 불은 명백히 보인다. 그러나 만질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다. 존재하지만 이해 못한다. 설명 못한다.  이해가 아닌 찬양의 대상이 하나님이다.


  선교사역을 돕는 일이 있다. 자기 맘대로 시혜 베풀 듯 주는 사람이 있다. 전체를 보는 눈도 없으면서 멋대로 행동한다. 결국 선교의 방해자된다. 모르면서 왜 설치나? 자기가 콘트롤하겠다는 뜻이다. 자아가 배부르겠다는 뜻이다. 자신도 속는 우상적 접근이다. 따르는 것, 순종하는 것이 섬김이다.


  우상숭배의 실체는 자식 교육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자식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하나님의 영광이냐 세상의 영광이냐?  그것 보면 안다. 그게 나의 실체다. 내가 못 살았기 때문에 자식에게 투영된다. 그게 내 모습이다. 우상이 보이냐? 죽이라. 철저히 죽이라. 내가 콘트롤한다는 것을 깨야 한다. 그리고 순종이다. 이게 신앙의 첫걸음이다.  


2.  “허용, 여유, 여백이 있는 삶”


  안식은 바로 체제에 대한 도전이다. 힘으로 빼앗고, 깡그리 내 욕심을 위해서 채우는 것을 거부한다. 가나안의 현찰은 “곡물, 감람유, 포도”이다. 그런데 모서리의 곡물은 거두지 말라고 한다. 가난한 사람과 짐승이 먹을 수 있어야 한다. 여유, 여백의 삶이다. 땅에 떨어진 5,000원을 줍지 않을 사람이 없다. 그러나 성도는 좀 흘리고 다니라는 말이다. 다 거두지 말라는 말이다. 노예를 풀어줄 때도 빈손으로 보내지 말라. 왜 이게 가능한가? 하나님의 축복을 믿기 때문이다. 인생은 하나님이 콘트롤함을 믿기 때문이다. 너무 악착같이 살지 말라.


  안식은 “자유 허용”이다. 탕자 아버지는 안식했다. 그래서 허용한다. 탕자가 나가면 망할 줄 알았다. 망했다. 안식하는 아버지가 있으면 돌아온다. 돌아온 탕자는 단순회복이 아니다. 아들로 새로워졌다. 아버지도 새로워졌다. 같이 새로워졌다. 새로움은 허용에서 나온다.  자유를 허용하면, 넘어짐, 실패, 죄악 조차도 새로워진다. 모두가 새로워진다. 바울은 이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표현한다.


  새로움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쥐고 못 놓기 때문이다. 집착 때문이다. 모든 교회 힘을 동원해서 교인들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율법의 힘으로 묶어 놓는 것이다. 갈 사람 가게 하라. 자유를 허용하라. 돌아올 사람은 온다. 새롭게 돌아온다. 다른 곳에 가더라도 새로운 사람으로 섬길 것이다. 없어져야 할 사람은 없어져서 새로워진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안식이 있기 때문이다. 축복을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새롭게 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자유를 허용하라. 믿음을 가지라. 합력하여 선을 이룸을 믿으라. 그러면 날마다 새로움의 힘을 느끼면서 살게 될 것이다. 집착한 것을 놓으라. 그래야 새로워진다.